고인이 된 한국현대문학의 거장인 소설가 박완서의 1979년 작품 ‘자전거도둑’을 읽었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수남은 “무슨 짓을 하던지 그저 도둑질은 하지 말라.” 라는 아버지의 인생 가르침과 돈 만 아는 주인 할아버지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결국 양심의 혼란속에서 갈등하던 주인공이 자신의 가치를 찾는 여정을 나타낸 작품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열 여섯 살의 어린 나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인간 본연의 양심을 지키는 모습에 중점을 둔 작품이라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시대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하며 이분법적인 양심을 두드린 작가의 문학적 가치가 높았다.
비오는 날 재수없게 바람에 넘어져 하필이면 비싼 자동차를 긁어버린 사건에서 이야기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당시 5천원이란 거금의 피해보상에 자신이 가진 재산목록 1호인 자전거가 볼모로 차압되자 묶인 자전거의 자물쇠를 주인 할아버지가 대신 쇠톱으로 자르는 행동에서 인간으로써의 양심에 자책을 느낀다. 결국 도덕, 자존심을 지키기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그려준다. 훗날 그날의 기억에 시름하다 아버지가 남긴 말씀대로 살기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이야기는 끝이난다
현재 3백만에 이르는 미국 한인이민자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이국에서의 삶은 마냥 즐겁기만 하지 못할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잠시 머물 곳이든 생을 마치든 간에 우리네 마음만은 고향 땅에 묻히길 바라고 있다. 아무리 현지적응을 잘해도 여전히 우리의 고향은 대한민국이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요즘 한국 정치판은 네편 내편 없이 불신이 팽배하고 있다. 정치적 협상만 가지고는 안된다고 여겨지며 성급한 나머지 편법도 주저하지 않고 있다. 점점 일방적이고 법을 어겨서라도 상대에게 무조건 복종을 요구하는 점이 많은 법조인과 지식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조금이라도 이견이 있을 경우 허구라는 탈을 쓴채 대화없이 적패로 낙인찍는 세상이 되고 있어 양심실종시대가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소설 줄거리에서 보여진 주인공의 심정갈등은 비록 자신소유의 자전거라 할 지라도 자신의 실수로 발생한 사건에 대한 일말의 양심을 느끼지만 여전히 현실간의 거리감은 있다고 묘사되었다.
현 시대는 세파에 지친 기득권 세대와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의 가르침사이에서 갈등하는 세대의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인간의 심성이 변화하는 시대와 충돌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어쩌면 처음부터 인간의 양심따윈 필요치 않다고 여기는 것 같다.
현재 대한민국의 모든 정치인들은 미물의 연어보다도 못하다.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찾아 생을 마감하건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자기가 할 도리와 행동을 실종하고 있다.
요즘 뉴스를 접해보면 도둑을 잡으려는 경찰과 검찰이 오히려 피의자에 의해 반대로 고발당하는 모양새가 되어가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기본적으로 사회질서 자체가 블랙홀에 빠져들어가는 현상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탓이라 인정하지 않고 남의 탓으로만 대변하는 하는 순간 사회는 희망을 잃고 만다.
연일 인터넷과 SNS를 통해 전해지는 한국발 뉴스는 이미 세계인의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다. 어느샌가 검은머리 황색눈의 미국시민이 되어버린 나 자신도 ‘과연 한국정치에 깊숙히 관심을 가져야 하나?’라는 물음을 접하게 된다는 대목이 왠지 안스럽고 씁쓸하다.
세상에서 길을 발견하지 못할때 종교인이라면 의례히 절대자의 말씀을 찾아나선다. 성경은 “지도자의 잘못된 인도로 많은 생명들이 죽음의 수렁에 빠진다”고 했다. 특히 로마서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라고 전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 많은 위정자들이 내뱉은 구름잡는 공약들을 철떡같이 믿는 순진한 우를 범해왔다. 그래도 지금까진 진실의 외침을 인정하려는 작은 배려심이 있었지만 선거철이면 철새들처럼 매번 정치인들의 입을 통해 마구잡이로 전해지는 왜곡된 진실과 당리당략에 덕분에 이마져도 상실되어간다. 국민들에게 잘 포장된 질곡의 역사를 전달하는 일은 역사의 죄인이 되는 지름길이다.
‘들음의 진실’ 자체가 사라지고 모든 국민들이 귀머거리가 되어 삶의 진정성과 공정성, 투명성이란 가치가 상실해 가는 것을 막을 자는 누구인가. 허구로 국민들을 호도시키려는 잘못을 하고 있음에도 올바른 비평이 없는 지금 그나마 소설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어 다행스럽다.
소설에 등장하는 수남은 ‘올바른 들음’이 있었기에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 찾기가 가능했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을 믿는 것으로 부터 구원이 시작된다고 했었다. 우리국민들은 누구로부터 회복의 역사를 접할 수 있을까.
어려운 시련과 고난을 겪어낸 오늘날 대한민국은 그동안 기성세대들이 배고픔을 참아내면서 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 중진국 과정을 거쳐 이제 겨우 선진국 반열로 들어섰지만 아직도 위기의 순간이다.
사실 개인이나 사회, 국가가 성공하기 위해선 정말로 힘든 순간과 위기를 극복하는 국민모두의 저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소설이 쓰여질 당시는 국민 모두가 굳은 결심을 하고 악착같이 절약하였으며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참아낸 결과 막대한 외화를 벌어 가능하였겠지만, 지금 청년들은 그저 포퓰리즘에 사로잡혀있다.
한나라의 국민들이 좋은 지도자를 만난다는 건 대단한 행운이다. 하지만 한국사에서 가장 운이 없는 시대가 진행주이다. 이런 시기에 이민자들은 다행히도 대단한 행운아인 것 같다.
자전거도둑이란 소설에서 그렇게 바쁘게 살며 정도 마음도 매말라가고, 참. 어떻게 어린 아이에게 자동차 주인은 별로 흠집도 나지 않았는데 그렇게 큰 돈을 요구할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도대체 돈이 뭐길래. 어린 아이에게 오천원 씩이나 큰 돈을 요구하는 신사의 그림자에 독자는 비열함을 느꼈다.
남 보기엔 어쩔 수 없이 도둑질을 하는 자신이 참 웃기면서 비양심적인 모습이 함께 느껴져 주인공 수남은 갈등하는데 아이러니하다. 스스로 반문한다 우리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리고 종착점은 어딜까? 연어가 눈에 어른거린다.

최영기/ 휴스턴이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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