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동이 트기도 전 책상에 앉았다. 마지막 한장을 남겨둔 달력이 쓸쓸하게 보인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예년과 달리 정치·경제·외교·안보·교육분야 비롯하여 사회 전반적으로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들로 인해 격동의 세월이 다시 시작된 것 같다.
이민사회역시 마찬가지이다. 예전같으면 북한이 핵실험을 하기만해도 신문에 궐기문이 가득하고 온통 전쟁이야기로 들썩거렸으나 지금은 아예 관심조차 없는 듯한 분위기다.
정부가 너무 정치적 이슈만 부각시켜 국민을 호도하거나 경제적 난관을 맞이한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본래 정치란 얼른뚱땅 쇼(show)다. 공연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이렇듯 민주주의에서 나라를 이끄는 대통령은 주어진 임기가 있다. 그러나 왕은 다르다. 그가 자의든 타의든 죽는날이 바로 임기가 끝나거나 바뀌는 날이기도 하다.
“전혀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보여주겠다”는 말은 무척 좋았다. 국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 나라의 위상도 높혀줄 캐치 프레어로써 아카데미 대상 감이었다. 화려한 문구. 세계 유수한 광고 카피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용비어천가에 정치인들의 명함 또하 가관이 아니었다. ‘더불어, 자유, 바른…’ 여기에 약방감초처럼 ‘민주’를 너 나 없이 마구 붙였다. 선열들의 생명으로 얻은 민주를 그렇게 쉽게 써버려 파렴치한이 따로 없다.
뭔가 그럴 듯한 이름들이 값도 제대로 못하면서 사분오열, 좌충우돌, 횡설수설해댄다. 여기에 언론들은 양심실종에 미친 사람처럼 널춤을 치고 있다.
올해 연말 연예대상은 이미 정해져 있다. 주연상과 조연상은 모두 대통령으로부터 임명된 장관들이 받게 될 것이다. 비록 상은 받겠지만 그들은 여전히 대사 한마디 없는 엑스트라일 뿐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논리 속에 대한민국은 전근대적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람이 그 자리를 망치기도 한다는 사실을 망각할 뿐이었지 위기의식을 처음부터 생각지도 못했다. 결국 완장 리더십이라는 블랙 홀에 빠져 정치·외교·안보·경제에 걸친 총체적 위기를 맞이한 이유를 모르고 글로벌시대를 맞이한 셈이다.
이렇듯 국내 정치판이 요동칠때마다 이민사회에 많은 여파가 밀려 들어왔다. 지난 100년간의 이민사를 돌아봐도 우리는 그저 몸만 이민생활을 하고 있지 정신문화의 정체성은 여전히 한국에 뿌리를 두고 있어 조금은 우려스럽다. 과연 지나친 국내 정치에 모든 촉각을 세운다면 이민생활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는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복잡하고 형이상학적인 논리로 가득한 정치문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삶이 될지도 모른다.
한국 근대사를 통해 눈부신 산업발전과 함께 물밀듯 들어온 검증없는 외래문화에 우리나라는 무방비 상태에서 노출되었다. 특정한 정보는 오직 특정인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치부되던 시대에서 인터넷시대가 열리자마자 여과없이 저마다 전문가인양 여론을 만들고 있다.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개 개인의 신상을 마구 노출시키고 악성댓글로 인해 벌써 여러 명의 안타까운 목숨을 앗아갔다.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그동안 우리민족은 한마디로 정 많고 여린 마음 탓에 타인의 부탁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보면 단호히 “노(No)”를 말하지 못하는 민족성이 이어져왔으나 최근들어 변화보다 변질에 가까운 형태를 보이고 있다.
역사의 미래를 확연히 알 수 없지만 이민사회에서 만난 이웃들 역시 쉽사리 속내를 간파할 수 없다. 어떤 이는 명예욕에 사로잡혀 자신이 지난 날 남겨놓은 발자취를 전혀 돌아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다른 이는 무슨 큰 원한이라도 있는 듯 돈이라면 신주단지 모시듯 애를 쓰고 용을 써댄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러나 우리네 민족은 엉뚱한 곳에 목숨을 걸고 있다. 남의 일에 무관심하면서도 간섭하길 좋아하고, 남을 칭찬하기보단 폄하와 비난, 루머를 생산하는 몹쓸 습관을 버리지 못하여 왔다. 아무리 돈이 많든, 건강한 육신을 갖고 있던 결국 영혼과 양심을 버린 죽은자에 불과하다. 마치 돼지고기가 속부터 썩어가듯이…

최영기/ 휴스턴이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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