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엔 스승이 보이지 않는다. 어린시절 고향마을엔 큰 소나무 숲 사이에 서당과 향교가 있었다. 하얀 긴수염과 모시적삼을 차려입고 사서삼경과 유교정신를 설파하시던 촌장님들이 우리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위 아래 구분없이 날뛰던 동네 건달들도 그 분들의 꾸지람 앞엔 영락없이 어린아이가 되어 고개를 숙이고 순종했었다.
하지만 요즘 사회나 학교에선 어림반푼 없는 말이 되었다. 이민사회에 단 몇 분의 선생님들만 있었어도 작금의 혼란과 땅에 떨어진 자존감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그 빈자리엔 회장님, 사장님들로 넘쳐나고 있다. 그들은 가난하던 시절 호령하던 대지주처럼 건방을 떨고 일자 무식한 신흥 졸부들 같아 보였다.
이미 우리사회의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선생님들이 사라진 지금 예의와 범절 따윈 길 가던 개도 관심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서양의 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 텔레스가 실존했던 시절 많은 철학자들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해 지식을 돈으로 바꾼 소피스트 철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본의 노예로 타락해버린 그저 그런 지식인들이다. 작금의 한인사회 지도자 행세를 하는 이들의 모습과 무관하지 않다.
왜 스스로를 평가절하한 삶을 고집하는가? 우리 주변을 둘러보자. 힘든 이민생활 속에 진정으로 의지하고 의논하며 가끔 따스한 차 한잔 나눌 마음씨 후덕한 스승같은 분은 어디로 사라졌나?
그나마 다행히도 주일이면 교회를 찾는 동포들은 목사님들의 설교 말씀에 위로와 위안, 평안을 얻고 있다. 인간의 원죄와 살면서 지은 죄를 씻으려 회개하는 믿음과 남들 이목과 사업상 찾는 요식행위로의 믿음의 끝은 분명 다를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교회를 찾는 이들조차도 종교를 떠나 많은 선생님을 그리워한다. 감히 절대자와 선생은 비교할 수는 없다. 너무 높고 존귀한 하나님과는 달리 일상의 사소한 고민거리를 의논 할 수 있는 좋은 선생님이 절실하다. 그렇지만 찾아볼 수도 만날 수도 없는 이민사회의 현실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개똥철학과 돈자랑, 영웅담으로 가득찬 주변사람들의 개인사로 가득한 이상한 세상을 직접 경험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생의 무상함과 무력감을 자주 느낀다. 왜 사는가? 무엇 때문에 고향, 고국, 일가친척을 떠나 이곳에 사는가? 여러가지 이유가 분명 있다. 살기위해 산다. 죽지못해 산다. 성공한 부자를 꿈꾸며 산다. 이런 바램엔 희망과 생명력이 없다. 불분명한 이유로 늘상 입 안에서 맴돌다 사라질 뿐이다.
특히 중년남성들을 위한 문화공간과 위락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취미를 공유할 꺼리 하나 없는 이민사회의 구조는 이민사회의 오래된 숙제이다. 반세기 전 휴스턴에도 한인공동체가 마련되었지만 무엇 한가지 제대로 타민족과 주류사회에 내세울 것 없이 허송 세월만 보냈다. 우리민족 고유의 ‘흥’을 나눌 작은 여유마져 가질 수 없는 곳이 한인 동포사회라면 도대체 지금까지 무엇에 목을 매었는가?
얼마전까지 치매와 노년기 건강에 좋다는 사교댄스(지루박과 부르스 등등)를 위해 노인회관이나 한인회관에서 라인댄스 교실이 있었고 한인타운 근처에 한 사업체가 오픈하였지만 이마져도 얼마 못가서 문을 닫았다.
현실가능성이 희박한 이야기지만 만약 복권에 당첨되면 이민사회에 ‘성인문화센터’를 건립하고 싶다. 그곳에서 다양한 강좌를 개설하고픔이 간절하다. 비록 유토피아식 꿈이지만, 에어로빅·요가·탁구·배드민턴·수영·가요교실·서예·꽃꽂이·바둑·시민상담·법률상담·인문학강좌·독서토론회·컴퓨터강좌·요리교실, 수채화교실등등…수 없이 많은 것을 상시적으로 개설 할 수 있는 건물을 마련해 아주 저렴한 수강료로 운영하고 싶다.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꿈은 꿈일 뿐이다.
지난 60년동안 간헐적으로 여러 문화 강좌들이 개설되었다 급히 사라진 것에 대한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바로 ‘선생님의 부재’이다. 믿고 존경하고 따를 수 있는 분들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하기야 함량미달의 선생 노릇하는 사람들도 가끔 눈에 띈다.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먼지 쌓인 오래된 창고 벽에 걸려있는 고장난 시계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장난 시계 역시 하루에 두번은 정확하게 맞는다고 우겨대니 말문이 막힌다. 지금 한인사회가 그런 지경에 이르렀다.
좋은 선생 아래 좋은 제자가 양성된다. 지금은 비롯 이민사회에서 비난 받고 무시당하는 사람들도 어딘가에선 크게 환대받고 인정 받을 수 있다. 권세없이 나약하게 보이는 이라고 해서 함부로 무시할 수 있다는 권한은 누구도 가질 수 없다. 하물며 신이라도 인간에게 그렇게 할 순 없다.
인간이 지닌 고운 심성과 무한한 잠재력을 외면하고 그저 현대사회에서 두드러지게 평가되는 자본(부)의 유무에 따라 인정한다면, 이미 우리네 공동사회는 나락으로 떨어진 것에 불과하다.
왜 사람들은 겉만 보는가? 하기야 속을 열어볼 외과의사 자격증도 없지만 설혹 있다손 치더라도 정당하고 합법적인 절차에 따르고, 상대의 동의를 공식적으로 얻어야 가능하기에 겉만 볼 수 밖에 없다고 역설적으로 강변한다. 내가 아니면 절대로 휴스턴을 청소할 수 없다고 자아자찬하는 사람들의 소인국이 되어간다. 하지만 그들에겐 미래를 열 열쇠가 없다는 점이 아쉽다.
그동안 이민사회에 난무하는 온갖 소문들은 유포하는 자들의 입을 떠나는 순간 진위조차 가릴 틈 없이 비정상적인 궤도로 우리 사회를 좀먹기 시작한다. 듣기 거북한 고장난 스피커일 뿐이다. 무슨 억하심정으로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런 터무니 없는 주장에 관심조차 보이지 말아야 정상인데 동포들은 현혹되어가고 세뇌되어 간다. 훗날 얼마나 많은 욕을 먹어야 정신을 차리겠나? 그들은 이웃의 말에 미안함은 커녕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비웃듯 온갖 행세를 하고 있다. 엉터리 같은 주장을 서슴치 이노으며 듣는 사람의 입장을 무시하고 있어 심한 구역질마져 느낀다.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동포사회를 이렇듯 어지럽히는지 이해가 안된다. 욕이라도 대놓고 하고 싶지만 그들의 입에서 ‘봉사’를 거들먹거리기에 참을 수 밖에 없다. 또한 허구로 맞서니 상대하는 나자신이 같아질까 두렵다. 몇 안되는 얕은 지식으로 공동체를 가르치는 모양새가 인본주의에 함몰된 패거리같아 보인다.
예전에 한창 골프에 빠져 정신줄을 놓고 있을 무렵 나보다 먼저 머리를 올린 동반자, 그리고 스코어가 조금 앞선 이들은 저마다 나에게 선생노릇과 프로행세를 하곤했었다.
남을 가르치려면 우선 자신이 선생자격이 되는지 돌아봐야 하는데 막무가내였다. 에티켓을 최고로 생각하는 골프를 단순히 핸디가 낮다는 이유로 엉터리 같은 듣도 보지도 못한 로컬 룰을 들먹이며 왕초보자의 지갑속 돈을 빼앗아 갔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음 상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 잘 살고 있을까?
가르치는 것과 가르키는 것의 차이를 인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남을 가르치려면 평생 무한책임을 져야한다. ‘선무당이 사람잡는다’는 말처럼 자칫 피교육자의 삶이 송두리채 엉망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스승이 그리운 시절이다.

최영기 / 휴스턴이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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