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시련은 경험할 수는 있어도 고독과 외로움을 참아내기 어렵다.
19세기 초입부터 세계인이 공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등장하였다. 에스페란토(esperanto)는 ‘희망하는 사람’이란 언어적 표현으로 1민족 2언어주의에 입각, 같은 민족끼리는 모국어를, 다른 민족과는 에스페란토의 사용을 통하여 만인 평등과 세계 평화를 추구하자는 일종의 언어 운동이다.
1919년 3.1일 나라잃은 조국의 운명 앞에 놓여진 시련은 극복하기 위하여 전국 방방곳곳에 울려퍼진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이는 곧 우리 민족 앞에 놓여진 시련은 있어도 결코 절망은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역사적 사건이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항아리에 가득담긴 콩을 일본경찰이 밟으면 어떻게 되겠는가?’라는 표현으로 국민적 저항을 그렸다. 이렇듯 지나친 내정간섭과 업악에 항거하여 자연스럽게 분출된 독립운동과 정신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여기 또다른 항일투쟁의 방법으로 국민들의 가슴속에서 새로운 패러다임과 운동의 자양분을 삼기위한 ‘에스페란토 운동’이 있었지만 우리는 대부분 잊
고 있었다. 호혜 평등에 기초를 둔 평화적 국제 질서를 추구하고자 마련된 이 운동은 시대적 흐름의 산물이었다. 또한 언어 패권주의를 주도하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 정책에 대한 국민적 저항 사상을 담기위해 1920년 김억이 한국YMCA에서 강습회를 열며 일제 강점기 국내외의 반제국주의 항일 투쟁에도 적극 활용되기도 하였다.
에스페란토 운동을 살펴보면 폴란드 북동부의 비알리스토크(Bialystok)시에서 성장한 루드윅 자멘호프(Ludwik Zamenhof)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당시 그 곳에는 주로 유대인, 러시아인, 리투아니아 인, 폴란드 인들이 살았고 그들은 언어 뿐만 아니라 종교와 사회 계층으로 나뉘어졌었다.
자멘호프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사용하는 언어를 만들고 싶어서 청년이었던 1878년에 첫 번째 버전을 만들었다. 19세의 생일 파티에서 그는 친구와 함께 첫 번째 “Lingwe Uniwersala”를 시작했으며 심지어 새로운 언어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후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그는 에스페란토의 첫 번째 교과서를 5개 국어(러시아어, 폴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 얼마 뒤 영어)로 출판 했다. 2년 뒤 뉘른베르크에서 첫 번째 에스페란토 그룹이 생겼고, 첫 번째 에스페란토 신문이 출판되기도 했었다.
500여개의 단어로 구성된 이 언어는 많은 국가로 급속히 퍼져나갔고, 또 그들의 사용으로 더욱 발전되어갔다. 1905년 처음으로 국제 에스페란토 대회가 열려, 수 십개 국에서 600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만났다. 그들은 이 언어가 모든 필요에 대해 아주 잘 작동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1908년 UEA가 설립되었으며 지금까지 에스페란토 운동의 주요 조직으로 남아있다.
근대 한국역사에는 홍명희씨가 1910년 중국 상하이에서 에스페란토에 입문한 이래 1920년 김억(김소월 시인의 절친이자 후원자)의 강습회를 개최하고 문학 동인지에 에스페란토 시를 발표하였다. 같은 해에 조선 에스페란토협회가 창립되었고 유봉영, 신봉조, 최해청, 안우생, 홍형의, 정지용, 오상순, 백남규, 박헌영, 석주명, 이종률 등 지식인들이 에스페란토를 학습해 문학, 교육, 국제 교류와 민족 해방을 위해 활용했다.
일본은 총 칼을 앞세워 이웃나라의 내부 동조자들과 야합하였고 또한 영토 찬탈과 침략지의 문화를 파괴하기 위해 일단 침략지의 언어자체를 말살시킨다. 언어는 곧 문화의 붕괴로 이어지고 결국 사상적 변형과 쇄뇌정책으로 국민들을 속국화시키며 마무리를 지으려 했지만 결코 우리 문화와 전통자체를 완전히 말살시키진 못한다.
36년 간 매국노들과 함께 일본제국주의는 이러한 작태로 우리 국민정서와 민족문화를 엄청나게 왜곡, 문화재가 파괴, 도굴시켰고 많은 변절자와 압잡이들을 크게 양산하였다.
또한 한국인들의 정기를 끊어내기 위해 산줄기마다 대형쇠못을 박았던 흔적들이 발견되므로써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대다수 국민들은 대외적으론 일본정부의 책임있는 진정한 사과를 요구하며 대내적으로 일제 잔재청산이란 숙제와 정신위안부 등 여러가지를 문제를 국정과제로 삼고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전까지 국내 지식인들과 수많은 해외 애국지사들은 언어의 소중함과 동시에 나라없은 서러움을 달래기 위해 또다른 애국운동의 일환으로 이렇듯 에스페란토 운동을 전개했다. 자주독립의 중요성과 당위성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 에스페란토를 적극 활용하기도 했다.
한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또다시 진정한 애국운동의 정신과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그때의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의 불씨를 되짚히는 노력들이 국내는 물론 해외 이민자들 사회에도 절심함이 뭍어져 나온다. 나라를 사랑하는. 근본 정신은 시대에 따라 형태상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특히 해외 이민자들의 시각에서 보는 자주독립은 오히려 국내 거주자들보다 훨씬 깊고 숭고하기까지 하다.
3.1운동이 한세기나 지난 지금, 해외 이민자들의 가슴 속엔 당시의 열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은 바로 해외에서 살아가는 이민자의 눈에 비춰진 조국 대한민국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우려가 크기 때문에서다.
오는 3월1일 우리는 일제에 맞서 “대한독립만세”를 대처할 또다른 명제가 무엇이고 역사를 위하여 민족 앞에 지켜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

최영기/휴스턴이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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