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운동가이자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였던 김복동 할머니가 지난 1월28일 향년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딸만 여섯이었던 집에서 넷째로 태어난 김복동 할머니가 “군복 만드는 공장으로 가야 한다”는 말에 속고, “딸을 내놓지 않으면 동네에서 살지 못하게 하겠다”하는 말에 놀라 집을 떠나 성노예로 끌려갔던 때가 고작 만 14살이던 1940년이었다.
이후 중국 광동, 홍콩,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와 자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지에서의 성노예로 모진고초로 겪었다.
해방이 되고도 2년이 지난 1947년에 귀국했지만 김복동 할머니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생기고 신고전화가 개통됐던 그 이듬해인 1992년에서야 자신의 피해 사실을 처음 고백했다.
1993년에는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로서는 처음으로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이후로도 미국, 일본, 그리고 유럽 등지에서 증언을 이어간 김복동 할머니는 일본의 사죄를 요구했다. 눈을 감는 그날까지도 김복동 할머니는 자신의 마지막 소원이 ‘일본의 사죄’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했다. 그러나 김복동 할머니는 일본정부로부터 사죄의 말을 듣지 못했다.
일본정부는 오히려 김복동 할머니의 별세 소식을 전한 뉴욕타임스(NYT)의 기사에 “일본은 위안부에 대한 성실한 사죄와 회한의 뜻을 전달해 왔다”는 허위 주장이 담긴 기고문을 보내왔다.
한국에는 김복동 할머니와 같이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던 피해자 23명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 김복동 할머니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닌 일본의 진정한 사죄’라고 외쳤지만 일본은 끝내 사죄를 거부하고 성노예로 고초를 겪은 피해자들을 외면했다.
일본의 진정한 사죄와 상응하는 법적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 성노예로 끌러가 고초를 겪은 피해자들뿐만이 아니다. 1941부터 43년까지 신일본제철의 전신인 일본제철의 일본 공장에 강제동원돼 고된 노역을 했지만 임금을 전혀 받지 못한 채 해방 뒤 귀국했던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도 있다.
한국 대법원으로부터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해당 일본기업은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내려졌지만 일본은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에 반발하며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운운하고 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지난 13일 누카가 후쿠시로 일한의원연맹 회장을 만나 일본이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에 반발하는 데 대해 “일본이 김앤장까지 내세워 재판에 임해 졌으면 결과를 수용해야지, 졌다고 수용하지 못하겠다는 게 앞뒤가 맞느냐”고 항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도 외쳐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100년전인 1919년 3월1일 대한민국에서는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인력과 군자금, 군수품을 한국으로부터 조달하면서 강제징용과 징발, 성금모금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력과 자본을 차출해갔다. 1941년까지 약 160만 명의 한국인이 일본 내의 공장, 건설 현장, 탄광, 농장에서 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김복동 할머니와 같이 10대 초반에서 40대에 이르는 여성들을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해 군수 공장으로 보내거나 일본군 성노예로 보냈다.
일본은 또 강압적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게 하는가 하면 일본어 사용과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민족말살을 위한 통치에 열을 올렸다.
치욕과 수치 그리고 질곡의 굴레와 암울한 시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있었지만, 1919년 3월1일 비로소 전국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이 들려왔다.
31운동이 역사적 의미를 갖는 이유는 당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한마음에 되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는 것이다.
31운동이 기폭제가 돼 그해 4월11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한 끝에 1945년 8월15일 드디어 광복(光復)을 맞이했다.
31운동을 기폭제로 임시정부가 구성되고 드디오 ‘광복’ 즉 ‘빛’(光)을 되찾(復)았지만, 우리들 주변에는 김복동 할머니와 같이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가 있고, 강제징용에 끌려갔다 임금한 푼 못 받은 피해자도 있다. 이들 피해자들은 여전히 어두운 그늘에서 살고 있다.
아직도 어둠속에서 신음하는 피해자들이 ‘광복’을 맞이하는 여러 길 중에는 일본정부의 진정한 ‘사죄’와 ‘반성’이 있다.
기미년 삼월일일 광복을 위해 삼천리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가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세계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렸듯이,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즈음에 휴스턴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일본 압제의 피해자들이 일본의 진정한 사죄와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곳 휴스턴에 알리는 일이 중요하다.

코메리카포스트, 옥외광고 준비
일본의 진정한 사죄와 반성을 요구하는 피해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곳 휴스턴에 알리기 위해 ‘생각하는 신문’ <코메리카포스트>는 옥외광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휴스턴 코리아타운 초입에 세워질 옥외광고판에는 “일본은 성노예 피해자들에게 사죄하라” “일본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 “일본은 독도가 한국 땅임을 인정하라”는 내용의 문구가 삽입된다. 고속도로가 정체되는 퇴근시간 때 휴스턴 코리아타운 방향으로 운전하는 휴스턴시민들은 대부분은 옥외광고를 접하게 될 것이다.
3월1일부터 시작하는 옥외광고를 통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이 잘못됐다는 것을,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사실을 이곳 휴스턴에 알리는 옥외광고 프로젝트에 벌써 많은 휴스턴 한인동포들이 참여하고 있다.
1919년 3월1일 한사람, 한사람 남녀노소가 모여 도로와 광장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듯이, 그래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함성으로 변했듯이, 휴스턴의 한인들이 모여 함께 소리를 낸다면 그 소리가 휴스턴에 전달되고, 휴스턴 시민들이 들으면 일본의 진정한 사죄와 반성의 시간도 더 빨라질 수 있다.

양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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