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말의 IMF 외환위기를 다룬 ‘국가부도의 날’이란 영화의 예고편을 봤다. 그리고 나는 지금이 IMF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민역사가 100년이 넘어섰고 내년이면 3.1절 기념일도 100주년을 맞이한다. 연말을 맞이하는 동포사회엔 요즘 재미있고 훈훈하고 감명 깊은 이야기나 소식은 아직 없는 듯하다.
20년 전 이민 초기 필자가 경험했던 휴스턴 동포사회와 지금은 사뭇 달랐다. 일을 마치고 새벽까지 테니스코트에서 팀을 나눠 운동하며 지친 이민생활을 달랬던 그때가 그립다. 또한 마을 공동회관을 빌려 크리스마스이브 행사를 하며 준비한 선물을 서로 교환했던 일들이 생각난다.
당시엔 IMF 외환위기가 한창 진행되어 모두들 어려웠는데 그래도 그때 기억을 떠올리면 가슴 뭉클함을 느끼기엔 충분하다.
감원, 감봉, 구조조정, 부도, 그리고 이민…
IMF 외환위기 당시 언론사에 몸담았던 필자가 많이 경험했던 단어들이다. 영화 시나리오 마지막 여자 주인공의 말로 전해지는 “위기는 반복된다”는 대사가 섬뜩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돌파할 것이라는 최근 한국은행의 추산 소식은 당연히 축하할 일이다. 그런데 1만달러, 2만달러를 돌파하자 곧이어 경제위기가 찾아왔다. 그래서 3만달러 돌파라는 말에 ‘위기 반복’이 오버랩된 것이다.
한국이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를 달성한 것은 1995년이었다. 이듬해에는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하지만 1년 뒤에는 IMF 외환위기를 겪었다. IMF 외환위기를 잘 극복하고, 2만달러 시대에 진입한 것은 2006년이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한국경제는 또 한 번 위기를 맞았다.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요즘, 한국인들이 느끼는 경제현실은 실상과 달리 많이 힘들다고 한다. 장사가 안 돼 죽겠다는 자영업자들의 비명의 소리가 이곳 이민사회에까지 생생히 전해지고 있다.
경제부총리의 “(경제적) 어려움은 상시화 될 것”이라고 퇴임사 말처럼 IMF 외환위기 때 내가 많이 들었던 “우리는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 처할 것이고, 어려움은 상시화 될 것”이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어려움이 상시화 된다는 것은 큰 위기이다. 곳곳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와 함께 위기도 같이 온다는 영화 예고편 같기도 하다.
‘위기’라는 말 뒤에는 항상 ‘극복’이라는 말이 따라 붙는다. 위기는 극복해야 하고,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기 극복은 실패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기존 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정책을 수정할 수 있다. 아주 평범하지만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진리다.
자신이 가진 신념에 대한 확신이 강한 자들은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짙다. 위기의 경고음이 곳곳에서 들려도, 과도기현상이거나 불가피한 부작용으로 잘못 인식하려 한다. 그러다보면 위기는 더 커져간다. 잘못된 길은 오래 걸어갈수록, 돌아오는 길도 그만큼 더 멀다.
다행스럽게도 요즘 휴스턴 한인사회에선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운 소식들 역시 잠잠하다. 태풍 전 고요인지 아니면 평화와 타협을 물밑에서 이뤄냈는지 다가오는 새해벽두를 지켜보면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의욕과 열정이 앞서면 간혹 실수 아닌 실수를 한다. 그것을 실패로 보거나 무조건 나무라는 것은 옳지 않다. 당사자 역시 실패를 인정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인정이란 정확한 현실사고의 자가 인식에서 출발한다.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실패를 인정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진리는 동포 개개인과 가정, 그리고 단체뿐만이 아니라 사업장, 지상사, 기관 등 모든 조직에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실패를 인정하는 것도 용기다. 그런 용기를 가진 자만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위기는 늘 반복되어간다. 그저 두려워한 나머지 극복에 대한 대비책 마련이 없다면, 지난 IMF를 경험한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최영기/휴스턴이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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