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상칼럼]
지역신문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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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분명히 한국이 아닌 미국이다. 그러나 가끔은 이곳의 교회들과 식당에서 동포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연예, 스포츠 등의 이슈 전반을 거침없이 평가절하·절상하는 것이 마치 서울 한복판 심야포장마차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연말이 되면 지나간 세월을 아쉬워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보다가 문득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도 한다.
그래도 어김없이 연말은 다가온다. 싫든 좋든 일 년 동안의 일들을 잊지 않고 살아갈 순 없다. 현재 우리 이민사회에는 여러 한인 언론사들이 존재한다. 규모의 크고 작음을 떠나 오늘 이 시간까지 한인 언론매체들이 명맥을 유지해 왔다는 점에서 먼저 박수를 보낸다.
다만, 간혹 신문지상에 올라오는 글을 읽으며 목적이 무엇인가 글의 의도가 무엇인가로 논란이 이는 때도 있지만 어쨌든 팩트에서 벗어나 잘못 전달되는 글을 읽으면서도 그러려니 하면서 지나쳐 버리곤 한다. 사실관계가 틀리다는 독자들의 몇 차례 지적에도 기사가 정정되는 일은 드물다. 확인하고 정확하게 작성해야 할 글에서도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슬그머니 물타기 하는 경우도 있다. 독자들도 이를 알면서도 묵인하거나 책임소재를 가리는 것이 귀찮다는 이유로 방관하고 넘어가는 일이 부지기수다.
특히 힘(?)이 있거나 글 쓰는 이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다거나 혹은 글 쓰는 이에 호의적인 단체나 친소관계가 결부되면 더욱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이럴 땐 기자가 기사를 작성하면서 기사에 등장하는 관련자가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마치 외과의사가 수술은 하되 환자의 몸에서 피한방울 흘리지 않게 수술하는 것과 같아 아슬아슬하다.
하지만 한인신문들 다수가 이민사회의 모든 이슈를 다루지는 못해도 동포사회에 경종을 울려주는 일부 한인신문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의 의식은 물론 무의식까지 지배하고 있는 경제중심, 권력적 사고의 유산은 결코 올바른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신문에서 수 십 차례 지적해도 법적 책임을 추궁할 수 없어 아니면 그 뿐이라는 식은 아니다. 이런 현상이 발생한 이유는 기자가 사건의 정확한 팩트와 개인의 영역에 근접하기란 경제적 법적 책임을 무한하게 져야하는 부담감이 크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이것이 글의 한계이다.
또 다른 이유는 글을 쓴 기자 또한 기사에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하지만 역부족이고 또한 소속된 신문사 사주가 무한 책임은커녕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탓도 분명 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선 기자의 자존심과 글 쓰는 이들의 팩트에 다가서는 데는 한계가 있고 그들의 자존심을 지키기가 무척 어렵다. 특히 언론사 사주 측은 광고주와의 보이지 않는 관계가 있어 현장 기자들의 발목을 잡는다. 정론직필과 촌철살인은 그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라 씁쓸하다.
우리가 늘 사용하는 ‘언론’이란 말의 근저에는 글 쓰는 이의 자기비하도 함께 묻어 있다. 청동 거울에 낀 때와 같은 이러한 현상을 깨끗이 걷어내야 언론의 독립정신과 자존심은 지켜진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언어마저 경제의 식민이 된다면 더 이상 이민사회에 글 쓰는 이들의 설자리는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언론의 자존감을 살려야 한다. 한인동포를 위한 지역신문이라면 이민사회의 흑과 백, 정감과 감춰진 진실을 제대로 알리기에 힘써야 한다. 지역신문은 그것을 만드는 구성원으로서 마케팅 차원이 아니라 이민사회의 미래를 구축하는 인문학적 자산이다.
따라서 우리 이민사회를 지키며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 얼마 남지 않은 올 한해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
다가오는 새해에 지역 언론사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우리 모두가 복안(複眼)을 느낄 수 있는 한해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독자들이 뉴스의 가치를 식별하는 안목 또한 차츰 길러지고 지역의 이슈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사회를 기대해 본다.
신문의 장점은 지면의 일관성이다. 신문은 책과 잡지와는 달리 새로운 화제를 망라하여 게재하며, 기사의 크고 작음에 따라 뉴스의 우선순위를 알 수 있게 해주므로 이 시대를 종합적으로 읽게 한다.
매주 발간되는 신문 읽기는 이민자의 호흡과도 같다. 이것이 신문이 주는 실질적 매력이다. SNS와 포털 등에서 보는 기사는 뉴스 가치 파악과 정보의 수용이 수동적이고 정적이어서 권장하기 어렵다. 종이신문은 지역의 이슈와 정보의 흐름을 종합적으로 포착·평가하는 동적인 읽기의 효용을 체감하게 한다.
예를 들면 신문읽기가 피부호흡이라면, 신서(新書)읽기는 폐호흡에 가깝고, 고전읽기는 심호흡이나 의식적으로 폐를 전부 사용하여 하는 복식호흡에 가깝다.
복식호흡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매일의 피부호흡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몸 전체의 감각이 둔해져 심호흡을 해도 산소를 제대로 흡수할 수 없다. 현대소설이나 고전을 아무리 읽어도 신문을 읽지 않는다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지역을 독해하기란 불가능하지 않을까.

최영기/휴스턴이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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