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상칼럼]
이민사회의 잣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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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을 알리는 비가 휴스턴에 내리고 있다. 마치 배고픈 아이들은 지켜보고 있는 밥이 더디게 익는 것에 애태우는 것처럼 별다른 변화 없는 이민사회가 조금은 답답하다.
간간이 들리는 장사가 잘 안 된다는 지인들의 말이 가슴에 비집고 들어오고 뾰족한 대안과 방안도 없고, 도움을 주지 못한 채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으려는 그들의 심정에 가슴이 아프다.
이민사회와 시장경제는 늘 그래왔듯이 기득권의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는 방어적 체계가 콘크리트 벽처럼 세워져 있다. 알듯 모를 듯 치열하고 간혹 신경질적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세상살이엔 언제나 조금의 속도와 거리가 있다. 이것이 자연의 질서이다. 너무 가깝고 허물없이 지내다 보면 알게 모르게 상대방의 흠집을 발견하고, 준 것 없이 시기와 질투, 미움이 싹트기 마련이므로 어느 정도 거리감은 필요하다.
우리 한인사회는 나름의 질서가 형성되어 있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되면서도 불편한 장면들이 가끔 목격된다.
운전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앞차와의 거리가 유난히 먼 경우가 그렇다. 안전운전을 한다는데 뭐라 말하긴 그렇지만, 뒤따르는 운전자들의 볼멘소리가 정말 난감하다. 옆 차선에서 수시로 끼어드는 상황이 반복되면 의도치 않은 무질서를 불러오기도 한다. 당사자 입장에선 안전과 배려일지 몰라도 뒤차 운전자들에게 오히려 정상적인 흐름을 방해하는 밉상으로 인식된다.
이렇듯 누군가의 선의가 또 다른 사람의 시간을 빼앗거나 스트레스의 원인으로 작용한다면 과연 합당한 일일까. 양보란 단어는 대개 아름답고 따뜻한 말로 쓰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민폐가 될 수도 있다.
남들이 뭐라든지 길게 꼬리를 문 행렬사이로 끼어들면 당사자는 그저 해피하다. 욕이 뼛속으로 파고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아는 얌체족들은 초행인 척, 초보인 척, 무지 급한 척하며 습관적인 만행을 저지른다.
그렇다. 지금까지 이민사회에서 묵묵히 자신과의 약속, 가족을 위해 의무와 책임을 지키고 노력해온 많은 사람들이 바로 질서를 잘 지켜왔던 운전자들이다. 운전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유혹이 따르지만, 대다수가 행하지 않는 이유는 준법정신과 부끄러움 때문일 것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인생은 다음 두 가지로 성립된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다. 할 수 있지만 하고 싶지 않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상황파악이 안되면 주제파악이라도 해야 하고, 설령 능력이 되더라도 가릴 줄 알아야 한다. 해야 할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될 일이 있음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의 상식이자 이치 아닌가. 그 판단은 오직 자신만의 몫이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시야가 좁아지고 계산이 빨라지며 몰인정한 사고와 생활습관에 익숙해지고 있다. 자신의 지나친 권리와 이익에 매몰되어 주장만 강조되는 사회에서 책임의식과 공동체 의식은 사치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경우의 수가 많아질수록 세상은 난해해지기 마련이다. 소수의 이익이 다수의 권리를 침해하면서 패배감·무력감을 안긴다면 당연 고쳐야 마땅하다.
옛 속담에 ‘맞은 놈은 펴고 자고 때린 놈은 오그리고 잔다’고 했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요즘이 그런 세상인 것 같다.
크든 작든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크기만큼의 대가를 치르는 게 맞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은 피해자 입에서 나와야지, 가해자가 먼저 꺼내면 싸움이 시작된다. 손톱만큼도 손해를 안 보려는 부류일수록 권리를 입에 달고 다니기 일쑤다. 이들은 핑계가 많고 변명에 능하며 잘 따지고 무례하기까지 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에 기생하는 ‘내로남불’일지도 모른다.
비 내리는 가을 녘에 조금은 불안하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렵기도 하다. 맞은 아이의 현재와 미래보다 팬 놈의 장래를 더 걱정하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음주운전을 범죄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 이민사회는 어떠한가? 정상적이지 않고 적법하지 않은 일을 스스럼없이 행하는 것에 대해선 아직 관대하다. 언어폭력도 엄연한 폭력이다. 오히려 물리적 폭력보다 더 엄하게 다스려야 형평성에 맞지 않나. 이런저런 이유로 눈감아주고 모르쇠로 일관한다면 그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결과가 좋으면 시작과 과정이 다소 불법적이라도 인정해주는 현실이 마뜩찮다. 자제하고 절제할 줄 아는 사람들이 뿌듯해하고 대접받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했다. 가정이든 사회든 뭔가가 잘못됐으면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제때 제대로 지적을 하면서 책임을 묻고 바로잡아주는 것이 선의의 피해자를 줄이고 다수를 보호하는 상수가 될 수 있다. 권리만큼이나 의무가 중요하고 절차 역시 중요하다. 자유와 방종은 반드시 구분돼야 한다. 책임 여부에 대한 언급 없이 ‘할 수 있다’는 긍정적 메시지만 날리면 절망의 늪으로 걸어가는 소금장수가 될 것이다.

최영기/휴스턴이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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