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상칼럼]
기사회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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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않고. 늙지 않고…’
불로불사(不老不死)란 현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엽기적 비극을 말하는 것이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고 기대하는 것을 보면 가끔 끔찍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 말을 ‘얼마나 오래 사느냐’ 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로 삼으면 어떨까.
인간의 생명은 당연히 존엄해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과 촛불집회가 진행되던 무렵 소설가 이문열씨는 한 신문에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글을 기고했었다. ‘위기의 대한민국…보수의 길을 묻다’라는 글이었는데 ‘보수의 거듭남을 위한 죽음’이 요지였다.
작가 이문열은 어느 나라 여왕의 어지러운 통치와 잠적한 여왕을 닮은 창녀의 처형 이야기 등 특정인의 죽음을 권유한 글로 많은 대중들로부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의미심장한 그 글의 시작과 중간 내용은 이렇다.
“죽기 좋은 계절이다. 참으로 많은 죽음이 요구되고 하루라도 빨리 그 실현이 앞당겨지기를 요란하게 기다리는 시절이다. 매스컴은 그런 죽음을 예고하고 혹은 초대하는 이야기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악머구리 들끓듯 하고 광화문광장은 벌써 두 번째로 백만을 일컫는 촛불에 휘황하게 밝았다…(중략)
그런데 형장에 이르자 그렇게도 자신이 여왕이 아님을 주장하고 살려주기를 애원하던 그 창녀가 홀연 여왕의 의연함과 위엄으로 군중 사이를 가로지른 뒤 총살대 앞에 선다. 자신을 여왕이라고 믿고 있는 군중을 위해 여왕의 기품과 비장함을 스스로 연출한 것인데, 놀랍게도 군중은 진정한 애도의 눈물과 탄식으로 자신들의 여왕을 보낸다. 보아라, 우리의 여왕이시다. 여왕께서 의연히 죽음과 맞서신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창녀는 세상의 그 어떤 여왕보다 더 품위 있고 고귀한 여왕이 되어 죽는다…“
이렇듯 ‘죽어야 산다’는 역설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적용된다. 근래 있었던 한인회장 입후보자 부재로 인한 비상대책위원회 구성. 모 은행 지점장 사표에 대한 동포사회의 술렁임, 그리고 은행 측의 불명확한 약속, 철지난 한인회관 건립을 둘러싼 각종 루머와 뒤늦게 등장한 이름표 없는 결산보고서, 무언가 쫓기는 듯이 밀어붙이는 한인회와 KCC간의 통합, 또한 지난해 별로 소득 없이 끝난 한인학교 모금파티의 재등장…
무엇이 이렇듯 급하게 진행될까? 이 모든 일들이 이민사회의 단면적 모습을 보여줄지는 몰라도, 진행과정이 2% 부족한 엉터리로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행태보다 그 속내가 자못 궁금해진다. ‘왜?’라는 물음에 책임질 사람, 대답할 사람 없이 지역 원로 한 분을 모셔두고 모든 것은 그 어른에게 물어보라는 식이 되면 안 된다.
우리 이민사회에는 좋은 전통과 관례가 남아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충효사상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교사상’이다. 불법을 저질렀던 말든 관계없이 장유사상에 입각하여 “어른이 그렇다면 그렇지 무슨 말이 많아~”라고 한다면 우리 젊은 세대의 미래와 다음세대의 갈 길은 뻔 하지 않겠나.
누구든지 자신이 죽을 각오로 ‘모두 내 잘못이다. 내가 다 책임지겠다’며 먼저 당당히 나서는 지도자를 찾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보다 더 힘든 하늘의 별 달기이다.
지난 반세기의 휴스턴 한인사회를 되돌아보자. 지난해 이때쯤 동포들은 얼마나 많은 시름을 겪었었나.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폭우에 삶터가 물에 잠기고 우왕좌왕하며 하루하루를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하늘을 원망했던 아픈 허리케인 하비의 기억을 벌써 잊은 것은 아닌가?
각설하고, 이민사회를 위한다면 엉터리라도 좋으니 솔직하게 속내를 내놓아야 한다. 그래야 배고픔은 면할 것이 아닌가. 그렇게만 된다면 오히려 많은 동포들의 마음에 감동이 전해질 것이고 다시 한 번 대단합이라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한인회를 바로 세우는데 무슨 그렇게 고학력 전문가가 필요한가. 지역신문에 아무리 훌륭한 글이 올라와도 거의 읽지도, 있는지도 모르며 살아온 젊고 스펙 있는 변호사들의 화려함과 학벌로는 통합의 정당성을 호소하는데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현실적으로 볼 때, 동포사회의 각종 행사에 1.5세대 젊은이(편의상 40대 이하를 지칭함)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관심조차 없다.
지금 젊은이들은 한인사회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결단과 용단을 내리기가 여간 쉽지 않다. 자칫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상을 입을 수 있고, 재기불능의 나락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위해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다. 유감이지만 정치인은 잘 죽지 않는 특성을 지녔다. 아니, 죽었다가 곧잘 살아난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건 정치인 말고도 더러 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잡힌 줄 알았던 바둑 대마, 어느 순간 되살아나는 꺼진 불 등등 여럿이다. 완전히 죽은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비실비실 살지 말고 오히려 깨끗이 죽어야 한다고 조언하고자 한다. 그대들도 조금만 있으면 된장찌개와 한국 대중가요를 즐겨 부를 날이 다가온다.
완전히 등진 고향과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복받인 서러움을 삼키며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이민 1세대. 어느 순간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머리가 흰 머리카락으로 가득한 것을 보고 어떤 상념에 빠지겠는가? 선거철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후보를 두고 망하려면 완전히 쫄딱 망하거나 죽어야 한다고 강조하던 사람들도 선거가 끝나자 어느 샌가 은근슬쩍 같은 배에 올라타 있듯이 시대나 역사는 반복에 반복을 거듭한다.
하기야 극심한 가뭄으로 바닥을 보인 하천에도 어느 날 신기하게 물고기들이 살고 있지 않았던가. 이런 사례들이 보여주듯이 지금 발걸음을 멈춰 섰다고 완전히 행로가 끝난 게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길이 끝나는 순간 새로운 길이 시작된다고 했다. 인생에서 큰 위기를 모면한 것은 바둑이나 장기에서 신의 한 수를 상대의 배려 덕분에 물린 것이라고 어느 고수가 말했듯 우리 모두는 어느 순간 과감히 죽거나 버려야 한다. 그래야 다시 살 수 있다.

최영기 (휴스턴이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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