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追憶)과 추억(追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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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나이를 먹어가면 자연히 옛 추억이 떠오른다. 추억여행의 종착지는 행복이란 곳이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본능이다.
학창시절 배나 머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조퇴를 하던 학우를 보았다. 그러나 등교 시의 모습과는 달리 느닷없이 병원에 가야 한다며 수업 중에 담임선생을 찾아가 교무실로 가던 기억이 있다.
급우들의 염려가 당연히 있어야 했지만 당사자는 그렇지 않았었다. 주변 친구들은 그에 대한 걱정은커녕 모두들 부러운 듯하였다. 그 친구의 부모는 학교 장학회장이었다. 점심시간 즈음하여 마치 얼음판을 미끄러지듯 운동장을 가로질러 들어오는 검은 세단 차와 깊은 연관이 있었기에.
그때부터 교정은 진리탐구와 청솔탑을 쌓기 위한 장소가 아닌 세상 물에 오염이 되고 있었다.
빽이 든든한 학생의 거짓 사유를 불 보듯 뻔히 알면서도 오히려 담임선생은 여느 때와는 달리 아주 품위 섞인 친절한 어조로 조퇴원인을 알아보기는커녕 어깨를 다독이며 얼른 집에 가서 몸조리하라고… 교실을 떠나는 뒤통수에 대고 부모님께 꼭 안부 전해달라는 말을 당부했었다.
의문점이 들었다. 아프면 먼저 양호선생님의 초기진단을 받아야 하고, 상태가 중하면 인근 병원이나 보건소로 연결하면 된다는 나의 어린시절 고정관념이 깨어졌다. 그리고 평소 우상과도 같았던 선생님의 말에서 “곧바로 집으로 가라”는 의미와 “부모님께 꼭 안부 전해달라”는 의미를 성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이해는 되지만 납득이 안 된다.
이렇듯 우리 사회는 이해와 납득의 기준점이 애매모호하다. 일반적으로 휴스턴 한인사회에 팔이나 다리 등이 아프다고 꾀병부리는 청소년이나 어른들은 보이지 않는다. 왜냐면 아픈 척하는 동포들을 도울 시스템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민생활에서 아프면 자기만 손해이기에 건강할 때 건강을 지켜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진실유무는 둘째치더라도 일단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평소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안에서부터 마음의 문을 잠가 버린다. 남의 눈치만 살피는 사람들이다. 밖에서는 절대 문을 열 방법이 없다. 이들은 서서히 자신들과 비슷한 행태를 보이는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 패거리집단을 만든다. 그리고 타인을 향해 그동안 응어리진 자신들만의 얼토당토 않은 여론을 확대하거나 조작하여 유포시키는 과정에서 카타르시스를 즐긴다. 이것이 거짓말의 진실이다.
여기에 자신의 잇속이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비공개 원칙’을 들먹이며 한 번 더 우리 사회를 우롱하게 된다.
그들은 동포사회가 아프거나 체했거나 소화불량에 걸려도 전혀 상관치 않는다.
의미 있는 행사준비나 결산보고도 그렇다. ‘알아서 했겠지 나랑 무슨 상관이 있냐’라는 식으로 무관심하며 “한인사회가 만날 싸움박질하고, 공금을 자기들 마음대로 쓰는데 무엇 때문에 기부하겠냐”면서 손사래 친다. 과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현장에서 단 몇 초라도 봉사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지 반문하고 싶다.
양호실에 학생들을 위해 마련된 비상상비약들과 양호교사가 늘 상주해 있지만 담임교사가 이를 패싱해버렸다. 우리 이민사회도 몇 번이나 소화제가 필요하다고 해도 아예 듣는 척조차 하지 않았다. 왜냐면 당사자들은 결코 아프지 않았거나, 혹시 의사진단 과정에서 다른 불치의 병이 발견되기라도 하면 큰 낭패를 보기 때문은 아닐까.
하지만 약을 먹고도 안 나았다고 하는 학생들의 거짓말을 진심으로 알고 조퇴를 허락한 교사를 나무랄 순 없다. 교사가 학생에게 가르칠 의무는 있지만 배울 권리는 학생들에게 있다. 가르칠 권리는 없다. 다만 후에 병원에서 발행하는 의사진단서를 떼어 오라고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교사의 마지막 자존심에 학생은 무척이나 곤란할 것이다.
휴스턴 한인사회. 이제 교사로부터 요구하는 의사진단서와 기록물들을 어디서 어떻게 누가 책임지고 가져올 것인가. 아픈 사람은 분명히 있다. 조퇴증도 발행했었고 시간도 많이 지나갔다. 의사도 병원에 있다. 그러나 정작 진단서를 발행할 그 누군가는 없는 것 같다. 답답한 나머지 누구에게 부탁이라도 해야 하지만 알 길이 없다. 아픔은 치유되었는지 몰라도 상처는 고스란히 남아 지금도 한인회관 입구에 동판으로 기록되어 있다. 너무 멀리 벗어나 돌아올 길조차 찾지 못하는 꼴이 아니길 바란다. 혹시 병원에 간적이 전혀 없었다면 낭패이다.
경우의 차이는 있지만 이미 중병이 걸린 사람에게 값비싼 진통제는 일시적인 효과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 치유될 순 없다. 그래서 치료는 ‘시기’가 중요하다고 한다.
나는 한인사회를 향해 구라치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길 바란다. 나 혼자만의 바램이 아니길 소원한다. 왜냐하면 조작이란게 그렇게 쉽게 들통나지 않게 만들었지 않았기에. 만약 그런 사실이 한인사회에 들키면 동포 모두에게 손가락질 당할 것을 감내해야 하기에 철두철미하게 숨기고 감추고 지우고 덧칠하고… 바쁘겠다.
결국 허위진단서는 학교와 학생, 교사 그리고 그동안 이어져왔던 사제지간의 좋은 추억을 단절시키고 먹칠하게 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평소 많이 애용하는 작은 거짓말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도 추하게도 만든다. 왜냐면 같은 거짓말을 두 번 하다가 들키는 경우가 되면 아름다움이 추한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히기 때문이다.
하여간 조퇴를 하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한다. 그러나 진짜 장례식 참석 등의 이유 때문에 조퇴하는 걸 부러워하는 사람은 당연히 없다. 장례식으로 조퇴하는데 그걸 부러워하는 수준의 무개념으로 동포사회를 우롱하거나 당시 열심을 다한 봉사자들을 희롱 하지 않기 바란다.
애초부터 휴스턴 한인사회는 지각과 결석은 있었지만 거짓 조퇴의 개념은 없었다.

최영기/휴스턴이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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