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행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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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상칼럼을 시작한지 5년이 되어간다. 지금껏 각박한 이민생활을 되돌아보면 매주 글을 쓰는 것이 힘든 일이기는 했지만 중심을 잃지 않으려 부단한 노력을 했다.
주로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읊조림과 변화무쌍한 정치적 사건 속에서 주제를 찾았고 형평성 또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본다. 평소 나 자신이 나태해지지 않고, 글의 전적인 책임은 나에게 있기에 매주 하루는 거의 밤을 지새웠었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나 자신이 계속 생각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공부를 해 올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감사한 일이기도 하다.
보기와는 달리 무척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인 내가 쓴 글을 읽고 조금은 후회스러웠던 적도 수차례나 된다.
아무튼 지금까지 매주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독자들의 칭찬(稱讚)과 격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배들의 요구를 받고, 그들의 강한 바램을 여과 없이 쓴 적은 없다. 글 나부랭이를 쓴다고 누가 원고료나 밥 사주는 일은 없었다. 욕먹지 않고 지금까지 온 것만도 다행이다. 경제적 이득이 생기는 일도 아닌데 시간을 내서 글을 쓰는 것은 힘든 작업이다.
그러나 정보의 나눔과 함께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슈를 수평적 견해에서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이민문화연구소의 문을 열었다.
몇 해 전 식당에서 만난 지인이 “지금 행복하세요?”라는 예상 밖의 질문에 즉답을 못하고 얼버무린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그때 왜 답을 하지 못했을까.
행복은 남이 내게 주는 선물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부터 솟아나는 샘물 같은 것인데… 다시 만나면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지만 그런 기회가 좀처럼 오질 않는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언젠가 천주교 한마당축제에서 처음 뵙는 여성분이 나에게 막걸리를 사주셨다. 생면부지의 노년기에 접어드신 분이 평소 내가 쓴 글을 신문에서 잘 읽고 있다면서 칭찬과 함께 호의로 선물을 주신 일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뭉클함을 느낀다. 글 쓰는 이는 외롭다. 하지만 이런 말 한마디를 들으면 언제 그렇게 힘들었냐는 듯 또 글을 쓰게 된다.
5월이 다가온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휴스턴 한인사회는 남성, 즉 남편, 아버지들의 어깨가 무척 무거워져 가는 듯한 분위기다. 50대를 넘기며 인생의 황혼기에 진입한 그들이 즐길만한 것 하나 없는 무미건조한 곳이 휴스턴이다. 외지에서 온 손님에게 그럴 듯하게 보여줄 곳이 없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이민자들은 한국의 남성들과는 다르게 소주한잔 나누며 담소할 흔한 포장마차 한 곳 없다. 고작 일주일에 한번 골프장에 나가서 동반자들이랑 담소를 나누며 피로를 푸는 일이 전부이다.
이것도 교회를 다니는 가정에선 찾아볼 수 없다. 주일마다 아내와 자녀들, 교인들의 눈치 보기에 급급한 나머지 골프하는 남성들은 죄인 취급받기도 한다. 물론 주일 성수는 당연히 교인의 본분이기에 말을 아끼게 된다.
아직 휴스턴의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지 않는 지금이야말로 야외활동의 최적기이다. 그런데 아내들은 남편들을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지나침(?) 덕분인지, 많은 남편들의 기가 상당히 죽어있다.
사실 부부생활하면서 어떤 부인이 자기 남편 앞에서 대놓고 칭찬할 사람이 있겠나. 전생의 철천지원수가 부부로 만나 살아간다는 말이 떠오른다.
간혹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이 문제다. 잘나가는 이웃집 남편과 비교되는 말 한마디가 마지막 남은 남편의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살아있는 남편이 죽은 재벌보다 훨씬 소중하지 않을까. ‘어떤 일에 흥미나 열성이 생겨 좋아진 기분’으로 부부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이런 이야기를 글로 옮기고 나면 나부터도 “곧 죽어도 꼴에 남자라고…”라는 말을 아내로부터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실제 남자와 여자는 생물학적으로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다. 언뜻 보면 여성이 남성보다 섬세하고 여리게 보이나, 실상은 여성이 훨씬 용감무쌍하다. 세계적인 의상, 헤어디자이너, 요리사들을 보라. 거의 대부분이 남성이다. 그러므로 남성들은 주위의 말에 굉장히 민감하다. 그 중에 누구보다 아내로부터 듣는 말 한마디에 죽고 사는 기로에 서있기에 배려가 필요하다.
최근 한국 드라마의 주인공들을 보면 꽃미남 배우들이 즐비하다. 내가 봐도 잘생겼다. 오히려 ‘이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드라마 주인공을 보면서 아내들은 대리만족 수준을 넘어 탄식마저 쏟아낸다. 드라마는 드라마 일 뿐인데도…
한글에서 ‘부부’는 글자가 똑같다. 물론 한자로 쓰면 다르지만, 읽는 소리로만 보면 동등한 의미가 담겨있다. 중년의 부부생활에서 남편의 어깨를 토닥거려줄 수는 없는가. 간 큰 남자로 살아가고 싶은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좋은 기운을 아내가 불어 넣어준다면 반대급부로 돌아오는 것은 모두 아내의 몫이 될 것이다.
이민생활에서 ‘흥미, 열정, 즐거운 기분’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현실 속에서 그래도 조금은 배려와 응원이 필요하다.
신을 ‘정신’(精神)의 ‘신’(神)에서 온 한자어로 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신명’도 신의 명령을 뜻하는 ‘신명’(神命)이나 천지의 신을 뜻하는 ‘신명’(神明)에서 온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신난다는 의미로 그런 한자어를 사용한 기록을 찾기 어려워서 어원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옛 기록에서 신나게 어떤 일을 한다는 의미를 기록할 때는 주로 미칠 ‘광’(狂) 자나 유쾌할 ‘쾌’(快) 자를 사용했다. ‘광’ 자는 ‘독서광, 야구광’처럼 무엇인가에 미친 듯이 열정을 쏟는 사람을 지칭하는 접사로 사용되는데, ‘신’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안에 있는 신을 내면, 그렇게 해서 신바람이 나면 그 사회는 유쾌하고, 좋은 성과도 이루어낼 수 있다. 그렇게 하려면 가정 안에서 칭찬이 더 많아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삶의 영역을 보면 칭찬에 지나치게 인색한 것을 볼 수 있다. 오히려 상대방의 작은 잘못이 있으면 그것을 비난하는데 더욱더 신을 낸다.
지금부터 이십년 전 즈음 대부분의 공중목욕탕에선 ‘쾌남’이라는 로션이 사용되었던 적이 있었다. 특별한 일이 아니어도 지금까지 함께 시간을 공유한 남편에게 ‘고맙다’는 아내의 칭찬 한마디를 듣는 남편들은 세상의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좋은 반찬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아내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것이 아니다. 지금 비록 잘나가는 몇 몇의 이웃들보다 못하고, 머리카락이 흰색으로 바뀌어 별 능력, 볼품도 없어 드라마에 나오는 꽃미남 명품 배우들과 확연히 달라 보여도, 잠시 눈이 뒤집혀 사랑에 빠져 결혼한 사이가 아닌가. 해서 앞으로 기회가 생길 때마다 돈 들지 않는 칭찬을 해주면 어떨까. 항상 ‘쾌남=우리남편’으로…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무슨 덕(홍복)을 얻고자 하는 의도가 없다면 더 늦기 전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용기를 내어보자. 비록 마음에 없더라도,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좋다. 아무튼 듣고 싶은 쪽은 남편일 것이다. 근대사적 폐습인 가부장적인 제도와 풍습이 가정에 많이 남아있다. 그렇다 손 치더라도 누군가는 가정의 기둥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이제 아내들의 든든한 칭찬을 들었다면, 남편 역시 당당하게 살아가자. 나중에 삼수갑산을 갈지언정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필자 역시 변변한 경제적 여유가 없지만 아내에게 충분히 할 말은 있다. “곧 죽어도 기죽지 않고 살아간다”는 말도 되지 않는 주장을… 비록 낯간지러운 표현일진 몰라도 이렇게라도 해야 기죽지 않고 제멋에 살다가 갈 것이라는 대부분 남성들의 ‘희망사항’이 아닐까.
삶의 동반자는 멋진 배우, 탤런트, 이웃집 아저씨도 재벌도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그동안 우리는 경쟁자를 칭찬하는 것이 자존심을 구기는 일이었다고 착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경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좀 더 잘하기 위한 다짐과 채찍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의 전환이다.
앞으로 “누가 가장 좋은 사람이냐?”이고 물으면 “아내”라고 대답하고 “지금 행복하세요?”라고 질문해 온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말고 “네!”라고 외칠 용기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후회 없는 생을 위해서라도 신을 내는 경쟁이 삶에 절실하다.

최영기/휴스턴이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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