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낯이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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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벌레로 변한 자신을 발견한다. 천식을 앓고 어려운 처지에서도 나름 성실하게 살아온 그였지만, 순식간에 삶이 바뀌었다. 카프카의 작품 ‘변신’의 주인공 이야기이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인간이 가진 원초적 본능, 신분상승, 명예 등이 사람들을 욕망의 화신으로 부추기고 있다. 경제적 이익을 위해 황금가면을 쓰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본 모습을 바꾸려는 것과 보편적 인간이 가진 욕망덩어리라고 보면 된다. 여기에 권력까지 얻게 되면 자신의 가치가 급상승할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아무리 화장술이 발전하였다고 해도 목욕 후 거울에 비춰진 모습에선 그저 민낯의 일부분일 뿐이다.
결국 화장으로 만족하지 못하자 이젠 변장을 해댄다. 이마저도 만족하지 못하자 면허 없는 의사가 운영하는 성형 수술대에 누워 불확실한 허상을 쌓아가는 행보가 안타깝다. 이러한 인간의 열망은 욕망이라는 험준한 산을 넘어 거대한 ‘오류’라는 흙탕물과 섞이게 된다. 결국 근본이 변하지 않으면 ‘실패’라는 깊은 늪에 빠지게 된다는 말이다.
21세기는 첨단 정보시대이다. 눈부신 과학 덕분에 은폐시킬 불법과 편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숨길 곳이 없다.
휴스턴 한인동포사회도 한 다리 건너면 모두가 이웃이고, 친지이고, 교우들이다. 모두들 저마다의 꿈을 갖고 나름의 변신을 꿈꾸어 왔지만 과거 없는 현재와 미래는 어림도 없다. 변신을 희망하지만 그저 일장춘몽에 가깝다.
특히 함량미달의 어설픈 지도자들이 그동안 업적이라고 내세운 것을 살펴보면 엉터리에 가깝다는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차마 말로 형용할 수도 없다. 더욱 우스운 것은 그들의 열린 입을 통해 내뱉어진 설익은 허구들에 언제까지 동포사회가 깊은 시름에 빠져야 하는가.
선배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일구어낸 이민역사의 고귀함도 배제한 채 자신들이 만든 폐쇄된 시스템 속에 스스로 갇혀 잠시 동포들의 귀를 현혹시키는 주장들은 헛소리에 가깝다.
오랜 세월동안 인간행동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온 문화인류학자들은 “대부분 신화들의 중심 테마는 변신이었다” “신화 속 영웅들은 자유롭게 변신을 거듭하는 존재들이었다”고 말한다. 신(神)중의 신이었던 제우스의 능력은 모든 신들을 압도하는 권위를 가졌고 그의 번개는 모든 존재를 완전히 없애 버리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따라서 변신은 곧 신화이고 강력한 힘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 역사의 밑바탕에도 이 주제가 단군신화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한마디로 우리의 조상 단군은 웅녀와 환웅이 각각 변신하여 결합한 성과였다. 곰이 인간으로 변신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통하여 성공하고, 다시 이를 가상하게 여긴 신이 인간으로 기꺼이 변신시킨 결과가 바로 단군이다.
인간이란 신화적 차원에서의 존재는 동물과 인간이 각각 자신의 존재를 벗어나고자 노력하여 이루어진 화신(化身)과 현신(現身), 곧 변신의 결과란 동물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인간이 되고, 거기에 감동한 신이 화답하면서 태어나는 존재를 인간이라고 밝히고 있다. 진화론이 아닌 변신론이다.
이렇듯 단군신화는 성(聖)과 속(俗)이라는 인간 존재의 양면성을 잘 보여주는 신화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책을 통해 다양한 지식을 알고자 하는 행위 역시 변신을 꿈꾸고자 함이 아닌가. 책이나 연극, 영화를 봄으로써 자신이 주인공으로, 다시 저자로, 독자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착각과정을 거치면서 환상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몰입의 순간, 주변은 보이지 않게 된다. 내 안의 꿈이, 본연의 죄악이, 나만이 최정상에 올라선 자부심이 드는데, 이것이 환상세계로 이끄는 착각이고 착란이다. 이 상태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은 부자연스럽다.
한인회관을 둘러싼 여러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보면 오랜시간 여러 사람들이 함께 일궈낸 것을 독차지하거나 생색을 내려는 자들로 즐비하다. 변신을 꿈꾸었던 자들의 흔적은 아닐까.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의 특징은 어제를 모르쇠로 일관하고,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는데 전문가들이다. 또한 기회만 생기면 현실을 부정하고 동포사회의 내일은 안중에도 없다. “보수 없이 봉사한 일에 뭣 하러 책임지겠냐”는 주장엔 묻는 이가 오히려 바보가 된다. 말문이 막힌다. 책임은 고사하고라도 자신들이 누려왔던 사회적 명예는 이미 기억조차 없다. 이 말은 책임질 일이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고 무시해 왔다는 증거이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어리석은 자는 책 한권 읽고 “인생 모든 것을 알았다!”며 옷을 벗어 던지고 미친 듯 거리로 나와서 동네를 시끄럽게 만드는 사람이다. 조언컨대 책을 읽기 전 ‘나’와 읽은 후 ‘나’를 되돌아보는 것은 변신의 전과 후를 극명하게 알아가는 총체적 삶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고 싶다.
몇 해 전부터 한인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가 품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하나 둘씩 접하면서 무척 마음이 상했다.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고 이웃 간의 벽을 온갖 이유로 두텁게 쌓아가는 사람들의 정체성에 의구심이 생기면서 혼란이 왔다. 그들과 관련된 사람들과의 대화 중에 과연 진실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기보다 왜 그들이 ‘변신’을 도구로 선택해야만 했는지를 알고 싶어졌다.
벌레가 되어 깨어난 외로운 현대인 그레고르가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된다면 우리 한인사회는 온갖 비리와 죄악으로 인해 서서히 사라져 갈 것이다.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슬프고 허망한 도시…
우리 동포사회의 변화가 아닌 변신을 지켜보는 나는 어쩔 수 없이 절망감에 눈을 감았고,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누른 채 정제되고 간결한 글로 대신할 수밖에 없는 나의 무능력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한번 생각해보자. 누군가 동포사회에서 사라져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지만, 그럴수록 그들은 보란 듯이 자주 언론에 회자되고 있다. 기이한 현상이다.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할 가치조차 없는 소문들로 풍파를 일으키지만 아무런 대책 없이 몇몇 지역 언론만 눈치를 보며 망설인다. 그래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매년 크리스마스 케롤이 울릴 적마다 새해에는 절대로 듣거나 만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여전히 우리의 가까운 곳에서 또 다른 변신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아침이면 창문 사이로 비취는 밝은 빛줄기로 시작하는 하루가 되길 간절히 소망하는 이민자들의 삶에 걸림돌인 그들이 아닌가. 60여년의 휴스턴 한인역사를 통해 선배 지도자들이 이룩한 성과는 무엇인가. 굳이 애쓰지 않아도 쉽게 답이 보인다. 동포 대다수의 뜻과는 전혀 반대였던 것을.
그동안 철갑처럼 단단했던 껍질을 벗기고 맨얼굴로, 맨가슴으로, 화장기 없는 모습으로 동포사회에 나오길 바란다. 바라건대 한인회관건립에 관한 무성한 소문의 끝이 변신이 아니라 진실이길 바란다. 세상에! 어쩌다 휴스턴 한인사회가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허구한 날 싸움박질, 수수방관 할 것이 아니라, 이제 종지부를 찍을 시간이 다가온다. 이번엔 제대로 해야 한다. 벌레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맨얼굴을 보여주길 희망한다.
이 모든 것이 제자리에 안착되는 날을 기다리며…

최영기/휴스턴 이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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