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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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윈드리버’를 감상했다. 치안이 보장되지 않는 미국 원주민 보호구역에서 벌어진 소녀의 살인사건을 쫓는 장면이 나오지만 FBI 요원과 야생동물 사냥꾼 이야기가 주제다. 황량한 설원 위에서 FBI 요원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에 직면하면서까지 사건의 본질에 빠르게 접근해가지만 정작 FBI 요원의 목숨을 구하고 범인을 찾아낸 이는 사냥꾼이었다.
그는 오랜 사냥경험으로 범인들이 남겨놓은 눈 위의 흔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재빨리 알아낼 수 있었다. 그 흔적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인생이라는 설원 위에 우리들이 무심코 혹은 의도적으로 흩뿌려놓은 자국들 같았다.
이렇듯 우리의 삶은 항상 흔적을 남기며, 누군가는 그 흔적을 알아본다. 테일러 셰리든 감독은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흔적’의 중요함을 알리려고 한다.
지구촌은 국가의 운명을 손에 쥐고 권력을 행사했던 지도자들의 암울한 흔적이 드러나면서 자신의 명예와 명성, 생명이 한순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자신들의 권력과 권한이란 힘으로 집권 당시의 흔적을 말끔히 지웠다고 믿었고, 설령 흔적을 남겼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쉽게 지워질 것이라고 믿었다. 아니면 치외법권이라고 믿었거나…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것이 두 가지 있다. 우리는 감정을 가진 존재이며 그 감정은 죽을 때까지 기억해 낼 수 있는 존재라는 것. 또 하나는 시간의 힘이다. 흔적은 옅어질망정 시간은 우리의 감정과 기억을 모아 그 모든 흔적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또렷이 보여준다.
인생을 도덕적 시각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카오스이론이라고 부르는 ‘비선형 물리학’적 시각으로 보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삶의 여정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창발적 현상을 보인다.
휴스턴 한인사회 지도자들의 행위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주위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이런 크고 작은 영향들이 정보의 형태로 네트워크(뒷담화)를 타고 흘러 다닌다. 여러 이웃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이 있다면 내가 피해 입기 전에 그 사람을 집단에서 몰아내려는 의도 역시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여론에는 흔히 ‘간접상호성’이라고 부르는 ‘평판’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누가 믿을 만한지 혹은 누구를 조심해야 하는지 뒷담화를 통해 정보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이런 현상이 생겨난다.
검증되지 않은 일반적인 평판의 힘은 엄청나다. 누군가가 나의 행동을 지켜보거나 흔적을 알아볼 수 있으므로, 당장 어떤 보상이 없더라도 누군가를 돕고 협력하도록 만드는 힘이 필요하다.
물론 처음에는 부정확할 수 있으므로 잘못된 평판으로 누군가는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소시오패스들은 이런 초기의 부정확성을 잘 이용한다. 그들은 자신의 본질을 감추고 외부 사람들에게 자신이 선한 사람인 것처럼 위조된 신호를 보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불확실성은 줄어들고 평판은 점점 더 정확해지고 날카로워진다. 누군가는 그의 본질을 알고 있으며, 그런 사람들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늘어난다. 이것이 시간의 힘이다.
시간이 갈수록 평판이 정확해질 수 있는 데에는 우리의 감정이 큰 역할을 한다. 감정이 별로 실리지 않는 사건은 일주일만 지나도 기억하기 어렵다. 그러나 분노나 감동처럼 강한 감정이 실린 사건은 세세한 부분까지 평생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이런 감정은 정보로 작용하여 네트워크를 떠다니며 흔적을 남기고, 세월이 갈수록 쌓이는 정보들은 네트워크에서 서로 부딪히며 상승작용을 한다. 그러므로 흔적이란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 법이다.
또한 시간이 갈수록 실수의 가능성이 커진다. 자신이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자신할수록 자신의 본질이 드러나는 실수의 가능성은 점점 높아진다.
요즈음 동포사회에 화두로 등장한 뒷담화 1위는 휴스턴한인학교 IRS 과징금폭탄, 2위는 휴스턴한인회관 건립결산보고, 3위는 단체 간 통합론이다. 언뜻 보면 화두 자체가 누군가에게로 향하는 의심의 화살인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시간이 지날수록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기 마련인데, 마치 물이 0°C에서 갑자기 얼음으로 변하는 것처럼, 많은 동포들을의 믿음을 어느 순간 불신의 골짜기로 밀어 넣겠다는 심산이 아니라면 동포 모두를 벙어리나 귀머거리로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그냥 방치한다면 동포들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어떠한 행동을 할지도 모르겠다. 굳이 누군가가 쇠고랑을 차거나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을 맞이해서야 되겠는가.

최영기/휴스턴이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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