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힘든 세상에서 일어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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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에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없는 것일까? 지금까지 비록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휴스턴 동포사회는 그래도 안전한 곳이었다. 하지만 각별한 주의를 요구하고 있다. 며칠 전 새벽녘 집으로 걸어가던 동포가 강도를 만나 폭행을 당해고 금품을 강탈당했다고 전해왔다.
걸어 다니는 것이 위험한 사회는 사람이 실아갈 수 없는 사회임이 분명하다. 아무런 사후조치도 없다. 동포사회까지 무관심으로 일관한다면 제2의 동일한 사건이 발생할 수도 있다. 단지 피해자한사람만의 문제만으로 치부하기엔 무방비 도시로 낙인찍히기도 쉽다.
안전 불감증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언제 어디서 어떤 사고를 당할지 모른다. 평소 조금만 주의를 갖는다면 사전예방도 가능할 것 같다.
사실 이민사회는 해가 지고 난 다음은 거의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과는 달리 밤 문화가 거의 없다. 특히 이번 사건은 주택과 교회가 자리한 지극히 조용한 거리였다. 사람들의 왕래나 교통량이 거의 없고, 그동안 동포들의 노력으로 자그마한 공원이 자리한 곳이었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간혹 신문지상에 올라오는 식품점주차장이나 상가주변에서 차량도난사고가 발생했지만 이렇듯 인명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끼치는 사건은 드물었다. 경제가 어렵다보니 생활형범죄가 발생하는 것 같다. 머지않아 경찰의 신분조회가 시행되고 법적서류가 미비한 이민자들은 운신의 폭이 줄어들 것이지만, 이것만으로 범죄를 예방할 수는 없다.
결국 적법한 신분이 아니기에 경제적 기회마저 사라지게 되면 먹고 살기위해 발생하는 범죄가 기승을 부릴 수 있다. 수년전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주택 밖에 설치된 에어컨을 훔쳐가는 일이라든지, 상가건물의 옥상에 설치된 냉동설비의 부품을 절취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행복한 삶을 누릴 자유와 권리는 모두에게 있다. 그리고 스스로가 방어할 권리 또한 가져야 한다. 밤새 들려오는 나쁜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려야 하는 동포들을 위해 이민사회의 궁극적인 대책은 없는 것일까?
또한 동포사회는 괴담에 많은 상처를 입고 있다. 사실 확인 없이 ‘아니면 그만’ 식의 허위사실로 장난질치는 일 역시 없애야 한다.
‘누가 이러 이러한 일을 했다더라…’는 식의 거짓말과 행동을 습관적으로 저지를 시간이 있다면 이민사회를 위해 삼가길 바란다. 망발과 근거 없는 비판은 범죄이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사회를 서서히 좀먹고, 나아가 인간 개개인이 누려야 할 자유를 구속하는 반인류적인 행위이다.
사실, 남의 집 살림살이는 그 집 주인 외에는 알 길이 없다. 굳이 말하자면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모두 진실은 아니라는 뜻이고, 남의 일에 참견치 말라는 말이다. 각자 말 못할 사유들은 그들 자신만이 알고 있어 ‘속사정’이라고 하지 않은가.
어느 누군들 말할 자유와 풍족한 삶을 영위할 권리가 저마다 있다. 하지만, 일부 가진 자들의 횡포로 허위사실이 진실인양 눈덩이처럼 부풀려진다. 거짓말이란 ‘주인 없이’ 길거리를 배회하는 금수만도 못하다’고 했다.
왜일까? 무슨 이유로 이런 잘못된 말장난에 자신의 아름답고 소중한 시간과 삶을 허비하려고 하는가?
하기야, 옛날부터 담장 뒤에 서서 남의 말 엿듣기를 좋아하고, 이웃마을 불구경과 싸움 구경엔 자다가도 뛰쳐나가는 습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들의 공통점은 직접 나서기엔 자격이 부족하고 그냥 두기엔 심불이 나서 ‘노는 김에 장독이라도 깨자’는 식이다. 어리석게도 상대적 빈곤감에서 나오는 망상적인 행동들이다.
비방은 비판과는 다르며, 욕설은 훈계와는 차원이 다른 말이다. 사실과 진실이 다르며, 아부와 칭찬은 다르다. 말이란 마음에서부터 분출되고, 양심을 바탕으로 생산되어야 한다. 조금이나마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경심이 있다면, 아름다운 이민사회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논어를 쓴 공자가 말하기를 ‘부화뇌동하지 말라’고 했다. 이는 자기주장이나 생각 없이 행동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러한 행위를 객관적 차원에서 평가하자면 한마디로 ‘민폐를 끼치지 말라’라는 뜻이 않을까?
더욱이 그들 곁에서 평소 조그마한 신세라도 졌다는 뜻에서 자신의 영혼까지 악마에게 팔아치우는 것은 감사도, 보은도 아니다. 그들의 잘못된 사관이나 생각을 아무런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끝내 부화뇌동까지 한다면, ‘거짓이 거짓을 덮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드는 일이 되어 결국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처사다.
60년 휴스턴 이민역사를 통해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카더라’ 식의 남의 이야기가 결코 이민역사에 기록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는 역사와 해프닝을 구분할 수 있는 양식 있는 동포들이 많기 때문이다.
헛소문의 본질을 찾아보면 사실 별 것이 없다. 그저 자기 분에 차지 않아서 하는 넋두리와 옹알이에 불과하다. ‘인간으로 태어나 옷 한 벌 얻어 입었으면 족하다’는 선인들의 이야기를 예로 들지 않아도 일반 상식선에서 비춰 쉽게 이해되는 구절이다.
얼마 전 극 이슬람 무장세력 (IS)가 바르셀로나에서 ‘묻지마’ 식의 자동차테러를 자행했다.
이로 인해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누구든지 쉽게 운전할 수 있는 자동차로 운전해 죄 없이 살아가는 평화로운 시민들을 향해 돌진하는 살인행위와 보이지 않고 직접 듣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이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모두 같은 살인적인 테러행위이다. 그들이 받은 상처와 가족들이 겪은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단 말인가?
불특정다수를 향한 망발과 범죄행위는 당사자를 상대로 하는 명예훼손과는 차원이 다르다. 특히 몇 푼의 향응을 제공받고 근거 없이 쌍나팔을 불어대고, 루머 양상을 하릴없이 재미삼고 습관적으로 내뱉는 듯한 부역자들의 행동 역시 삼가야 한다.
패거리란 말은 이런 형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집단은 자기의 권익과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일이지만, 주동자들은 자기 자신의 이익과 권위, 체면을 위해서 그동안 자기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을 이일에 강제로 동참시키고 있다. 이것 역시 ‘갑질’이라는 사실에 통탄을 금치 못한다.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 이같이 행위는 비슷하지만,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우선 집단이기주의는 소속된 단체를 위한 명분이라도 있지만, 패거리는 그렇지 못하다.
자세히 살펴보면, 빈 깡통이 소리 나는 이유와 같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가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상대를 헤치려는 의도로 제동장치를 뜯어낸 것을 ‘범죄’로 규정함이 마땅하다.
판사가 판결문 서두에 ‘처음부터 피의자에게…’라는 말을 하면 징벌적 판결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하지만 ‘피고는 평소…’라는 말로 훈계를 하는 것은 결국 법이 허용하는 한 최대의 구속유예나 집행유예, 또는 가벼운 벌금형, 무죄를 판결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가 있다.
우리들은 어떤 경우에 속하는가? 비록 법정 다툼까진 가지 않더라도 일반적인 시각에서 과연 누가 누구를 비판하고, 판결할 것인가? 종교적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면 구약 이사야 2장22절에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로 대신할까 한다.
이제 생각 없이 내뱉은 말들이 내일을 향하는 이민사회에 먼지처럼 존재한다. 사실이든 아니든, 우리가 알든 모르든지 간에 입에 입을 통해 전해진다. 그것을 노리고 특정인을 상대로 퍼트리는 작태는 테러이고 폭언이고 유언비어 날조이며, 총알 없는 무기로 협박하는 범죄가 아니면 무엇일까? 암적인 존재를 더 이상 두고 봐야하는 참담한 심정을 그들은 여유롭게 즐기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법집행자나 판사가 아니다. 우리에겐 적절한 처방약도 보안대책도 대처방안도 없다. 그저 맥없이 당하고 있다. 현대는 기록의 시대이다. 각종 데이터로 점철된 삶이, 현대과학의 힘을 빌려 지금까지 일방적인 공격에 대비하여 그들의 오염된 족적과 흔적까지 모두 차분히 모으고, 언제일지는 몰라도 허위사실을 만든 이들과 대적할 방안을 강구할 수밖엔 없다.
당장이야 편하고 아니면 그만이다. 현실도피성 발언으로 지금까지 재미를 봤다면, 단언컨대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라. 그리고 ‘내일, 미래에 다가올 심판을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다. 자기반성 없이 오만하게 말하며 자신이 저지른 행동들은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통해 모두 되돌려 받을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밤 말은 쥐가 듣고, 낮말을 새가 듣는다.

최영기/휴스턴이민문화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