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예수를 은전 서른 닢을 받고 팔아넘긴 인물은 제자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사람입니다. 하필이면 제자였던 것입니다. 굳이 제자가 아니어도 계략을 꾸며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해지도록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를 시기하며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종교 지도자들이나 권력을 지닌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데 많지도 않은 열두 명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에 성자 예수님의 제자가 악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다행히 나머지 열한 제자들이 유다처럼 배신하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순교로 그의 뜻을 세상에 전파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불러모으신 제자 가운데 유다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유다는 스스로 목을 매고 죽음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인간에게서 완벽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선을 추구하고 아름다운 사회를 꿈꾸는 공동체에서도 이런 악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각 종교에서는 가르침을 주는 성직자들과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도들이 있는데 이들 가운데에는 유다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그 종교 전체가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머지 열한 제자들과 같이 배신하지 않고 가르침에 충실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 한 제자를 보면서 나머지 열한 제자들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열한 제자들을 보면서 유다 한 제자를 볼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희망과 실망이 함께 공존했던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을 보면서 내 눈 앞에 있는 종교나 사회를 바라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선과 진실과 아름다움을 추구한다고 선포하며 노력하는 종교와 공동체에서 실망스러운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어쩌면 이천 년 전 예수님은 이미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열두 제자들을 통하여 미리 알려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종교를 갖지 않은 무종교인들도 양심에 따라 열한 제자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양심을 배신하며 유다처럼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미시적으로 개인 차원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열한 명의 충실한 제자가 내 몸 안에 있어서 희망과 행복을 바라보는데 한 명의 유다가 있어서 이 희망과 행복을 망가뜨립니다. 진정한 선과 행복을 보지 못하고 눈 앞의 욕심에 잘못된 판단과 결정으로 일상을 망가뜨리거나 일생을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만약 이런 제자 유다가 자신 안에 전체를 꽉 차지하게 되면 목을 매어 삶을 마감하는 모습까지에도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한 제자에 의하여 희망과 행복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눈 앞의 욕심보다는 먼 훗날의 진정한 행복에 촛점을 맞춘다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소위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들이 눈 앞에 보이는 좋지 않은 성적표에 자녀들을 다그치고 안달한다면 자녀들의 자존심이나 인격에 손상을 주게 됩니다. 자신감 있고 훌륭할 성품의 모습을 바라보지 않고 눈 앞의 성적에만 집중한다면 오히려 자녀를 근본적으로 망치는 결과를 자초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열한 명의 제자들로만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는데 이런 생각 자체가 이미 한 명 유다의 제자를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속하는 단체나 종교에서도 유다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이미 유다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종교나 단체가 잘못했을 때 이를 감추기 위한 악을 저지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정하기 싫은데 유다 법칙은 현존합니다.

강원웅, 전 휴스턴한인학교장 (wonysemail@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