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견문]
<서유견문>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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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몰락 예언한 유길준, 우리는 그를 몰랐다

연초 연달아 여행기를 읽었다. <유라시아 견문> 준비 차였다. <왕오천축국전>(혜초 지음, 정수일 옮김, 학고재 펴냄)으로 출발해 <동방견문록>(김호동 옮김, 사계절 펴냄), <이븐 바투타 여행기>(이븐 바투타 지음, 정수일 옮김, 창비 펴냄), <서유기>를 지나 <열하일기>까지 내달렸다. <오도릭의 동방기행>(정수일 옮김, 문학동네 펴냄)도 곧 손에 들 작정이다.
유라시아는 오래전부터 冊(책)으로도 연결되어 있었다. 종교와 사상과 문화가 흐르고 섞이는 문류망이 도저했다. 이 서물들에 대한 소회는 그때그때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을미년 초두에, 연재의 서두에 각별하게 할애하고 싶은 책은 따로 있다. 유길준의 <西遊見聞(서유견문)>이다.
올해가 꼭 출간 120주년이서만은 아니다. 의외로 배운 지점이 많았다. ‘의외’였다는 점이 포인트다. 애당초 기대가 적었다. 명색이 동아시아 현대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지만 개항기가 산출한 최고의 문헌을 읽어보지 못했다. 모르던 바는 아니었다. 허나 귀동냥 수준이었다. 후쿠자와 유기치의 <서양사정>을 베꼈다는 풍문이 선입견을 더했다. 구미형 근대화를 맹숭하는 개화파의 태작이려니 지레 짐작하고 있었다. 미리부터 1894년 東學(동학)을 누르고 西學(서학)의 승리를 확인하는 저작으로 재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막상 책을 펼치니 빠져들었다. 만만치 않았다. 간단치가 않았다. 과연 어설프게 아는 것은 모르는 것만 못한 법이다. 그가 궁리하는 개화의 개념과 방법이 발군이었다. 어떻게 조선의 근대를 자주적으로 이룰 것인가를 깊이 궁리하고 제안한 국정 개혁 제안서였다. 전혀 낯설지만은 않았다. 조선 사대부의 시무책을 잇고 있었다. 정치, 경제, 법률, 교육, 문화 등 다방면의 개혁안을 제시했던 연행록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다.
시점이 절묘했다. <서유견문>이 출간된 1895년은 마지막 연행단이 귀국한 해이기도 하다. 사정이 복잡했다. 파행의 연속이었다. 그들이 중국을 방문한 해는 1894년이었다. 하필 청일 전쟁이 발발했다. 귀환 날짜가 밀리고 밀려서 해를 넘겼다. 청의 패배가 확정되고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 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귀로 또한 생경했다. 사행단이 오가던 육로가 아니었다. 청의 군함에 실려 인천으로 들어왔다. 바다의 시대가 조선을 삼키고 있었다.
귀국 후 행적도 이전과 달랐다. 의당 수행해야 할 왕에 대한 보고가 누락되었다. 조청 관계가 극적으로 변했던 탓이다. 조선은 어느새 자주 독립국이 되어 있었다. 대청사행을 보고해야 할 까닭이 사라져 버렸다. 누천년 사대-자소 관계가 일시에 무너졌다. 일본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와 평등하게 경쟁하라는 만국공법 시대가 열렸다. 조선은 갑오개혁을 단행했다. 연행단이 베이징에 발이 묶여 있을 무렵이었다. 연행록은 더 이상 선진 문물을 수용하는 경로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의 귀국은 너무나 늦은 것이었다.
연행록을 대신한 것이 바로 <서유견문>이었다. 유길준은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다. 도쿄에서는 일본 근대화의 사상적 대부, 후쿠자와 유키치를 사사했다. 신청년의 첨병, 신문화의 첨단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전이 있었다. <열하일기>(1780년)와 <서유견문> 사이가 그리 멀지 않았다. 양자를 잇는 자리에 환재 박규수가 있었다. 박규수는 박지원의 손자이자, 유길준의 스승이었다. 혈연과 학연을 타고 조선의 문류도 흐르고 있었다. 북학파와 개화파, 100년을 잇는 연결망이었다.

儒學(유학)과 留學(유학)
유길준은 1856년 北村(북촌)에서 태어났다. 조선 정통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家學(가학), 즉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 양질의 유교적 소양을 터득할 수 있었다. 더불어 당시 첨단이었던 경화(京華) 학계의 학풍을 섭렵했다. 소싯적부터 조선 주자학의 정수를 충분히 흡수했던 것이다.
박규수를 만난 해는 1873년. 유길준은 18세 청년이었고, 박규수는 66세 노년이었다. 환재가 별세하는 1877년까지 만년의 완숙한 사상을 전수 받았다. 청나라의 세계 지리서 <海國圖志(해국도지)>를 건네받은 것도 박규수의 사랑방이었다. 이로써 청의 양무 운동을 학습하고, 유형원과 정약용 등 조선 실학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서유견문>을 비롯한 숱한 시무책에도 논어, 맹자, 주자는 물론, 실학파들의 연구 성과가 크게 참조되었다.
유길준은 구미 유학을 통하여 개화파로 전향했던 것이 아니다. 조선을 떠나기 전에 이미 개화파였다. 조선의 전통을 이탈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일부를 계승하고 확대 발전시킴으로써 자생적 개화파로 거듭났던 것이다. 즉, 유교적 變通(변통)론의 연장선에서 구미 문명을 수용했다고 하겠다. 때문에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유학생들의 고질적인 병폐를 면할 수 있었다. 유학하는 국가에 대한 맹목과 맹종을 거두었다. 조선적인 것을 떨쳐내려고 안간힘을 쓰기는커녕, 전통에 대한 자부심으로 단단했다. 자학과 자만 너머에 떳떳한 자긍을 세웠다.
이러한 태도는 국한문 혼용체로 표출되었다. <서유견문>은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 문헌이라는 점에서도 각별하다. 유길준은 몸소 문법책을 저술했을 만큼 문체 연구에도 열심이었다. 모름지기 문체는 사상의 뼈대이다. 그가 漢文(한문) 탈피를 표방했음은 분명하다. 하더라도 國文(국문)이 곧 漢字(한자) 탈피는 아니었다. 한자 또한 국문의 하나였다. 아니 가장 오래된 국문이었다. 도무지 한자를 버릴 수는 없었다.
한글과 한자를 병용하는 것이 새로운 국문이요, 새 시대의 문체였다. 이 또한 한글 전용으로 내달리며 일어와 영어에 복무했던 설익은 개화파들과는 결을 달리하는 지점이었다. 그는 문체에서도 동서고금 균형을 잃지 않았다. 즉, 국한문 혼용은 비단 한글 전용으로 가기 위한 이행기의 흔적이 아니었다. 나름의 고금 간 통합술이었다. 그래서 漢學(한학)에 함몰되지도 않고, 國學(국학)에 매몰되지도 않는 내재적 지역학(Area Studies)으로서 또 다른 東學(동학)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西學(서학)으로 단련된 儒學(유학), ‘지구 지역학(Glocalogy)’으로서의 동학 말이다.

개화와 중도
그만큼 개화파도 천차만별이었다. 본인도 절감했던 모양이다. 스스로 개화의 등급을 나누었다. 유길준에게 개화는 곧 근대화가 아니었다. 서구화는 더더욱 아니었다. 일본 따라잡기, 미국 따라 하기와 일선을 그었다.
무릇 개화란 인간의 천사만물이 지선극미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일컬었다. 까닭에 개화의 여부를 한정할 수가 없었다. 개화에는 종점이 없으며, 고로 역사에도 종언이 없었다. 역사란 변혁과 성쇠의 순환이지, 진보와 발전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가 견문한 구미 또한 문명의 정점, 개화의 최종 형태가 아니었다. 아니, 서구 문명을 ‘진(眞)개화’라고 장담할 수 없으며, 앞으로 그 처지가 어찌될지 알 수 없다고 단서를 달았다. 과연 20년 후에 유럽에서 제1차 세계 대전(1914년)이 발발했고,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이 출간된 것은 1918년이었다.
우유부단함이 아니었다. 得中(득중)의 태도였다. 개화한 자는 천만가지 사물의 이치를 따지고 밝혀 경영하는 자이다. 따라서 날마다 나날이 새로워져야 한다. 그러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아야 했다. 남의 장기를 취하되 자기의 장점도 키워야 했다. 처지와 시세를 감안한 후 제 나라를 보전하면서 개화의 공을 이루어야 했다. 추수가 아니라 혁신이었다. 변혁적이되, 중도적이었다.
때문에 개화당과 수구당을 공히 비판했다. 갑신정변에 호통을 쳤다. 시세와 처지의 분별없이 남 것만 숭상하고 제 것을 업신여긴 착오를 범했다고 했다. 그래서 ‘개화의 죄인’이었다. 반대로 남 것은 덮어놓고 오랑캐라며 배척하고 제 것만 천하제일인양 여기는 수구당은 ‘개화의 원수’라고 질타했다. 또 주견 없이 남의 겉모습만 따르는 자는 ‘개화의 병신’이라 일갈했다.
즉, 그의 득중이란 좌/우, 보수/진보 사이에서 회색 중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동과 서, 고와 금에서 중용을 지키는 자세였다. ‘전통 없는 근대’가 개화의 죄인이라면, ‘근대 없는 전통’은 개화의 원수였다. 기민함과 완고함의 차이가 있을 뿐, 분별력이 모자라고 몰주체적임은 개화파도 수구파도 마찬가지였다.
개화의 여실은 주체의 역량에 달려 있었다. 핵심은 교화된 인민의 존재였다. 開化(개화)는 敎化(교화)의 산물이었다. 개화는 곧 進化(진화)이기도 했다. 경쟁이 적자생존, 우승열패를 의미하지도 않았다. 진화와 경쟁을 향상심을 발동시키는 수양이자 격려로 수용했다. 내면의 수련을 통한 교화의 최종적 결실이 개화로 맺어지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래서 득중을 먼저 이룬 자가 지나친 자를 타이르고, 모자란 자를 다독일 것을 권장했다. 민중을 추키지도 않았고, 대중을 깔보지도 않았다.
결국 두루 선비가 되는 나라, 國民皆士(국민개사)론을 제창했다. 훗날 興士團(흥사단)도 설립했다. 서구의 시민이 ‘재산’에 기초한 주체라면, 동방의 시민은 ‘덕성’에 바탕을 둔 주체였다. 그래서 민을 정치적 주체로 세우는 제도적 절차(선거)만큼이나 민의 인격적 도덕화를 강조했다.
아니 정부의 역할 자체를 사람의 귄리 보장(복지국가)에 보태어 사람의 도리 교화(인문국가)에 있다고 여겼다. 정치란 불완전한 인격체를 조금씩 조금 더 나은 인격체로 진보시키는 학습과정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서유견문>에서 피력하고 있는 이상적인 개화 또한 법치와 덕치의 최종적 상태인 ‘無爲之治(무위지치)’에 근사했다. 그는 천상 사대부, 개항기의 개화된 사대부였다.

진개화
유길준의 독보를 추앙하려는 뜻이 아니다. 단독자도 아니었다. 눈을 유라시아로 돌리면 여럿이었다. 중국에는 <大同書(대동서)>를 집필한 캉유웨이가 있었다, 향촌 건설 운동의 량수밍도 있었다. 인도에는 타고르가 있었고 간디가 그 뒤를 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폐허에서는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가 고투했다.
각자 처한 장소는 달리했지만, 동서고금을 회통하는 진개화를 궁리했다는 점에서 동지이고 반려였다. 현실에서는 좌절했다. 20세기는 사나웠다. 설익은 개화파, 웃자란 쭉정이들이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들의 후예가 개발파와 개혁파였다. 산업화는 따라잡았고 민주화도 따라했다. 하건만 나라꼴도 지구촌도 갈수록 흉흉하다. 헛 개화의 末路(말로)이다.
판 갈이는 이미 시작되었다. 탈냉전은 또 다른 개항기였다. 대륙으로 유라시아로 다시 길이 열렸다. 왕년의 초원길, 바닷길에 하늘길까지 분주하다. 고로 포스트모던(Post Modern)은 치우진 독법이었다. 서구적 근대의 종언이자 탈서구적 근대의 개막이 더욱 합당할 것이다.
유라시아는 그 지구적 근대의 中原(중원)이다. 20세기에 억압되었던 역사의 무의식이 중국몽, 인도몽, 아세안몽, 이란몽, 터키몽으로 피어난다. 유라시아로 방향을 선회(U-tun)하여 견문을 이어가는 까닭이다. 헛개화를 거두고 진개화를 이루는 새 역사의 현장을 목도하기를 소망한다. 개화는 여전히, 영원히 진행형이다.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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